
처음으로 비행이 하고 싶다 생각했던 지점은 바로 '자유로움'에 대한 갈망이었다. 불안한 미래로부터의 자유로움, 퇴근 후에도 일에 대한 생각없이 마음껏 쉴 수 있는 자유로움,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자유로움, 그리고 무엇보다 땅에서 벗어나 드넓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다는, 자유로움.
오늘도 새벽 5시에 눈이 떠졌다. 매번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마다 그랬던것 처럼 밤새도록 꼬리를 물고 물리는 꿈들에 시달리다 이른 새벽에 눈을 떴고 다시 잠들기는 틀렸다싶다. 그러다 방금까지 꾸었던 꿈이 문득 떠올랐다.
나와 동생이 제주로 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는데 왠일인지 나와 동생은 제복을 입고 있다. 앞 줄에 앉아있던 ㅡ4년 전 E항공사 입사 당시 대표이사ㅡ C사장이 나를 부른다. 오랫만이야, 무심히 인사를 건내고는 다짜고짜 면접을 시작했는데 지난 4년간 분주히도 잊어버렸던 비행지식들이 머릿속에 떠오를리 만무하다. 뒷 줄에 앉아있던 동생이 열심히 훈수를 두어보지만 소용이 없다. 결국 제대로 된 대답 한번 해보지 못했고, 응 수고했어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C는 무심히 일어서서 일등석 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초저녁 제주공항의 비행기에서 내리며 나는 동생에게 안겨 참 많이도 울었다. 요즘은 더 이상 안경을 끼지 않지만 꿈 속에서 끼고 있던 안경이 눈물 범벅이 될 지경이었으니 참 많이도 나는 억울하고 원통했나보다. 이제는 진짜 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공항 화장실에서 제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동생과 나는 공항 근처의 횟집으로 가서 소주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담배 한 개피가 생각이 나서 잠깐 밖으로 나서는데 많이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중학교 때 친했지만 지금은 SNS 정도로만 안부를 묻는 친구 두명이 가게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금방 서로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인사에 순간 속으로 '아, 제복을 갈아입지 말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눈을 하고서는 나는 참 속도 없지. 누군가에게 제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는데.. 하는 바보같은 미련을 곱씹으며 친구들에게 학원 명함을 내밀었고 나는 잠을 깨었다.
최근 두어달 간 몸이 많이 아팠다. 작년 연말에 학원 경영상 골치 아픈 일이 몇 가지 있었는데 내 몸에 이상을 감지하게 된 것도 그 즈음이다. 정신과와 내과를 오가며 밤에는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강의를 이어나가던 시기다. 어쩌면 내년 있을 재입사를 앞두고 보잉 737 기종 필기시험을 먼저 봐놓는 것이 어떻겠냐는 과거 E사 입사동기들의 권유에 출근 시간을 3시간 앞당겨 오전에는 시험준비을 병행했다. 한창 학원에 연이어 문제가 터지던 시기라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공부하는 내내 학원 일 생각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고 직원들이 출근하는 1시부터는 계속해서 전화와 노크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간신히 시험은 통과했지만 병세는 더 악화되었고 결국에는 강한 진통제 없이는 강의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내 자신의 한계를 실감하며 결국 어느 날 강의 도중 수업을 중단하고는 진정제를 입에 쏟아넣고 내 방으로 쓰러지다시피 도망쳐 버렸다.
아마 그때 즈음일 것이다. 직접하는 강의 없이 학원 경영에만 참여한다 해도 비행과 학원을 동시에 머리에 이고 간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읊조림을 동료 원장 L에게 넌지시 털어놓았던 것이. 결국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언젠가 오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속으로는 그 답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미련이 남아 마음속으로 산만하게 들끓어대고 있었을 뿐. 시간이 지나고 몸도 회복이 되면서 끓어대던 마음도 이내 잠잠해 졌지만, 그 속에서 함께 끓고 있던 고민들은 마음이 식은 후에도 그대로 남아 그동안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나보다.
며칠 전 친동생과 주고 받은 문자메세지 내용 탓이었을까, 얼마전 타 항공사로 이직해서 마침내 부기장 클리어를 받았다는 E사 입사동기의 SNS 글을 잠들기 전 읽은 탓이었을까. 오랫동안 꾸었던 비행의 꿈이 이렇게 길고 긴 하룻밤 꿈으로 나에게 작별을 고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새벽에 눈을 껌뻑여보다가, 아니 그래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오기 어린 욕지거리 사이를 수십번쯤 오가다 몇 자 남겨본다. 꿈꾸던 내내 부활의 네버 엔딩 스토리라는 곡이 들렸는데, 말 그대로 엔딩 스토리가 될지 네버 엔딩 스토리가 될지는 좀 더 고민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