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정체성과 문화 이데올로기, 그리고 대중음악
문화 정체성이란 한 국가 혹은 문화권 단위의 구성원들이 동일한 문화적 규범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성질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은 구성원들의 생활과 가치관을 규정하며 더 나아가 구성원들 개개인의 정체성에도 큰 영향을 준다. 문화 정체성은 구성원들 고유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바탕으로 형성이 되는 것이지만 다른 문화의 영향도 주고 받으며 변증법적인 진화를 계속해나가게 된다. 문화 이데올로기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 글에서 주로 논지를 전개해나갈 입장인 마르크스의 입장을 살펴보자. 그는 이데올로기는 일정한 허위의식을 조장하여 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로 인해 생산되는 대중문화의 내용은 지배계급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 대중들이 계급적 갈등과 불평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문화 정체성과 문화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중문화를 설명하는데도 지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 중 가장 큰 부분 중 하나인 대중음악은 해방 후 70, 80년대를 지나면서 그 다양성이 극에 달했고 다양한 계층에서 터져 나오는 욕구와 취향을 잘 반영하고 있었지만 90년대 들어서 상업적인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그 가운데 새로운 독점적 이데올로기의 구축이 시작되었다. 언젠가부터 ‘대한민국 음악에는 하위문화가 없다’라는 이야기가 돈다. 하위문화는, 각 대중집단이 각기 다른 삶의 조건에서 살면서 각기 다른 욕망과 필요에 따라 생성하는 문화이다. 그리고 그 문화는 계급이나 성, 세대 등으로 구분되는 커다란 범주에 속하면서 각기 다른 속성에 의해 구별되는 다양한 소집단의 독특한 정체성을 반영한다. 하위문화는 지배적인 문화에 대한 다양한 하위집단의 의식적 및 무의식적 대응이며 거기에는 어떤 형태든 하위집단의 욕구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즉, 하위문화는 지배문화의 지배력과 하위문화의 저항력이 일정한 수준에서 만나 타협한 결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에서 이 모든 것은 경제적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소위 ‘잘 팔리지 않는’ 음악은 변두리로 몰려나서 그들만의 지하세계에서 (소위 언더그라운드라고 불리는) 서식하고 있으며, TV의 공중파로 대표되는 오버그라운드와의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져 가고 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인기를 얻은 밴드가 TV 공중파에 출연을 하고 CF를 찍으면 바로 배반자의 낙인이 찍히는 현상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사물화란, 사물화란 인간들 사이의 질적인 관계가 상품 사이의 양적인 관계로 바뀌는 현상을 지칭한다. 사물화된 세계에서 사람들은 깊은 무력감과 소외를 겪게 되지만 대중문화가 제공해 주는 환상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그러한 모순을 깨닫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대중음악에 점차 상업적인 파워가 유입되면서 다양성은 점차 사라지고 ‘돈이 되는’ 것들로만 일률적으로 채워지는 현상이 생겼다. 대형 연예 기획사가 육성한 10대 아이돌 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아직 채 고등학교에도 입학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 짧은 치마와 짙은 화장을 하고 엉덩이를 흔들어댄다. 그런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대중들은 앞다투어 그들이 입고 나온 옷을 사 입고 음악을 들으며, 대한민국의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똑같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TV 프로그램은 ‘소녀시대’나 ‘원더걸스’가 출연하는 프로그램과 나오지 않는 프로그램으로 나뉘고, 소년과 소녀들은 그들을 보면서 스타라는 실체 없는 허황된 꿈을 꾼다. 누구도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들 아이돌 스타의 신곡 제목을 모른다는 이유로 시대에 떨어진 사람이라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언제 어디에서든지 똑같은 음악을 듣고,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대화의 주제 속에 그들 아이돌 스타가 있어야만 동질감을 느끼고 비로소 같은 문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허황된 안도’를 하는 현상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아이돌 간의 ‘문화적 서열’은 음반 판매량과 가요 프로그램 순위로 매겨진다. 개인의 취향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그들은 그 대중문화 속에서는 사회나 경제적 계급 혹은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정치 등의 사회적 지렛대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움직이는 일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고대 로마시대의 검투사 경기와 거기서 나누어주는 빵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로마시민, 배우들이 연기하는 포르노 영화를 보며 흥분하는 관객, 그리고 소녀시대의 노래와 율동을 보며 열광하는 오늘날의 대중. 이 세가지 사례의 공통점이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행복하지만 속고 있다. 더 큰 속셈이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말이다. 물론 문화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모두 완벽한 의미로써의 다양성 보장과 균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중 문화 속에서 대중 개개인은 모두 평등하다고 느끼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눈뜨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대 뒤의 조작자, 즉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칼 마르크스는 계급문화론이라는 개념을 들면서 이데올로기는 계급의식이 생겨나지 못하게 막는 역할과 지배방식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베트남 전이 한창일 60, 70년대 무렵, 새로이 생겨난 히피문화는 문화적 이데올로기를 전복시키며 독창적인 가치관을 확립하고 대의명분 없는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을 비판했다. 당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니던 세대들은 오늘날 정장을 입는 기성세대가 되었지만 그들의 문화는 아직까지 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누리던 문화가 누구의 이익이나 계획에 의해 조장된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공고한 문화 정체성을 바탕으로, 문화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고 항상 문제의식을 지니며 싸워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드스탁을 통해서 전 세계에 메시지를 전했지만 오늘날의 대중문화에 파묻힌 대중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